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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5 새생명 묵상(6과 죄란 무엇인가?)_김기업

(1)본문의 이해 (눅 15:11-32) 누가복음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의 주제인 '죄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말씀을 통해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은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살다가 허랑방탕해져서 거렁뱅이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자식을 가장 사랑한다. 또한 맏아들이 나오는데 이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은 죄인이다. 즉, 하나님을 떠난다 해도, 교회 안에 있는다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둘째 아들은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며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기 원한다. 즉,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재산을 들고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모든 것을 내주신다. 심지어 아들이 어떤 상황에 놓일지 뻔히 아시면서도... 그렇다. 이미 다 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주신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자신의 재산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죄의 근본은 불순종이다. 둘째 아들은 재산만 있으면 살 것 같다고 느꼈다. 불순종의 시작이었다. 불순종은 거역을 본성으로 한다. 그 반대는 순종이다. 순종은 기본이 훈육이다. 그 이후에 교육이 들어가는 것이다. 순종을 배우는 것이 축복의 시작인 것이다. 아버지를 통해 보여지는 사랑의 하나님은 바로 축복의 근원이 되신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절대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시대이다. 둘째 아들처럼 내 뜻대로, 내 중심, 나의 본성/감정을 중시하며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원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것을 잃어버리고 살았을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둘째 아들과 같은 '허랑방탕'일 것이다. 허랑방탕, 탕진, 굶주림, 죽음 등...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전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17절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돌이켜' 즉,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우리의 하나님을 떠난 삶 자체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삶이다. 그러한 채로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갈 때 비로서 진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고집, 이기심 육욕, 영적 빈곤, 비천함의 상태를 거쳐 완전히 굶주린 자가 되었다. 제대로 그 바닥을 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이와 다른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도 죽을 자리임에도 현 상황을 전혀 보지 않는다.

반면 맏아들은 한 번도 바닥을 쳐본 적이 없는 모태신앙이다. 하나님과 함께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20절에서 아버지는 저 멀리서 둘째 아들이 오는 것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춘다. 계속해서...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둘째 아들이 겪는 상황의 바닥은 영혼의 바닥과 같이 간다.

이렇듯 바닥을 치고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제 돌아온 탕자가 사는 삶은 전혀 다를 것이다. 철저히 회개한 사람의 축복을 누릴 것이다.

22절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신다. 이는 '지위의 회복'을 상징한다. 그리고 가락지와 신을 준다. 이것은 완전한 사랑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벌인다. 이 송아지는 중요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그' 살진 송아지. 이미 아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송아지인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집에 살며 행위로만 순종한다. 29절에서 보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하듯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 이 맏아들은 '나는 열심히 순종했는데 못 받았다', '나는 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재산이 다 너의 것인데 왜 화를 내느냐' 맏아들의 관심은 아버지께 있지 않았다. 오직 '재산'에만 있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면 더 많은 재산을 받을거야'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같이 살아도 마음의 교통이 없으면 관계가 단절될 수 밖에 없다. (창 3:1-6) 마귀는 말씀을 가지고 시험한다. 첫째,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 둘째, '진짜 죽을까?' 이러한 마귀의 접근법은 하와로 하여금 생각이 돌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하와는 대답한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없던 말을 지어낸다. 즉, 말씀에 대한 불평을 표출한다. 말씀을 아예 희석해버리고 만다.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거짓 확신이 든 것이다. '죽으리라' 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후의 삶은 마귀의 종노릇하는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귀는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할까 하노라'라고만 할 뿐 결국 결정과 선택은 하와에게 달려 있었다. 즉, 결정은 나의 몫인 것이다. 여기에 죄의 대가,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요 8:44-45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지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마귀의 종노릇하며 온갖 좋은 것을 탕진해버린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히 기다리신다. (호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세아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나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불붙듯 하시다. '나는 너를 놓을 수가 없구나'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이렇게 축하하는 것은 24절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즉, 거듭난 것이다. 오직 아버지의 관심은 이 '사랑의 회복'인 것이다. 사랑이 회복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말한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이 어마어마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2)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본문의 내용처럼 두 아들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자식을 가장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모든 것보다도 우리를 가장 사랑하신다. 심지어는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내가 둘째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다해도, 첫째와 같이 하나님 곁에 있는다해도 어떤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도 그저 끌어안으실만큼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으시는 사랑이다. 그저 '이 나의 사랑을 좀 믿고 만끽하지 않을래?'라고 물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되는... 맏아들과 같이 이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자체만으로 최고의 복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그 잃어버린 관계의 회복, 사랑의 회복이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이 거듭나서 그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오직 유일한 관심이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3)내가 받은 은혜와 감사 나는 새생명을 3주 전에 처음에 듣고 어제 두 번째로 다시 듣게 되었다. 처음 새생명 6과를 듣고 나서 심목사님과 교인분들과 나눔의 시간을 가질 때가 생각났다. 나는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둘째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모태신앙이지만 하나님을 모른 채로 방황하다가 건짐받아서 돌아온 탕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는데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둘째 아들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느새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가 들어 맏아들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 둘째 아들은 진짜 허랑방탕하여 완전히 굶주리는데까지 가서야 비로서 돌이켰지만 저는 감사하게도(?) 육욕 단계 정도에서 평안이 있는 교회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얼마나 답이 없는지 인정할 수 없었고 아직도 내 안에서 무언가 찾아내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를 하면서 '나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잖아'라며 온갖 불평, 불만이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네, 저는 맏아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거듭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교회 안의 육적 신자), 그것이 바로 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그 바닥을 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내 안에 수많은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이 집의 주인은 누구냐? 그 아버지 입니다. 그렇지, 그러면 이 집에서 누구에게 관심을 쏟아야겠느냐? 바로 그 아버지 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들은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서도 정작 주인이신 하나님한테는 관심이 전혀 없구나"

네 맞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습니다. 휴학하고 교회 안에 들어와 '이제 진짜 시작해보겠습니다'라고 결단하였지만 아직도 관심은 나에게 있었습니다. 난 아직 바닥을 보지 않았구나. 난 그때 바닥을 친 줄 알았는데... 그건 바닥이 아니었구나. 답답해졌습니다. 그러면 난 어떻게 바닥을 쳐야하는거지. 뭘 비워야하는건가? 뭘 포기해야하는건가? 행위로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두번째로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바닥을 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 대신 죽으셨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고 매일 매일 올라가는 삶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는 죽고 그 분만 사는 삶을 사는 것 말입니다. 나는 바닥을 치는 것이 내가 해야하는 영역이거나 하나님이 날 고통으로 몰아가시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내 대신 그 바닥을 치신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이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나는 진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구나. 내려가는 것도, 올라가는 것도 오직 주님께 달린 것이지, 피조물인 나는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길이구나. 그래! 날마다 나는 죽고 그 분만이 사는 삶! 그것 아니면 내가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4)내게 주시는 교훈 오늘 새벽기도 전 심목사님께 어머니의 일로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서 다단계회사를 알아보시고 그곳에 깊숙이 들어갈 준비를 하신다는 것을 어제 알게 되고 나서 어떻게 할 지 몰라 너무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제가 아무리 설득한다해서 바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저라면 이런 순간에 역시 돈이 문제구나. 내가 돈을 벌어서 어머니가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하고 이런 일 안하시도록 해야해.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런 생각과 상황이 분리되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 어머니가 이런 반복되는 실수의 상황을 계속가고 있는데 이런 순간에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지금 휴학하고 교회 안에 들어와 이제 좀 하나님 앞에서 해보려고 하는데 이렇게 또 내 마음이 요동치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하는거야? 나는 어떻게 방향성을 잡고 이 남은 휴학기간을 보내야 하는거지? 와 같은 수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심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떤 방향성을 정하고 가야하는겁니까?'

목사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너의 상황이 돈 때문인 거 같니? 돈이 많으면 달랐을까?" 고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돈이 많고 적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죄의 문제였습니다. "엄마를 먼저 바꾸면 너도 바뀔 수 있을까? 아니, 엄마는 엄마대로, 너는 또 너만의 죄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 너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너희 엄마, 누나 누구도 바뀔 수 없어. 어떻게 지내고 있니?" HCS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다. "교회에서 너가 이것저것 봉사하면서 10년 있어도 안 바뀔 수 있어.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너가 이십 몇 년동안 세워놓은 너의 촉수를 말씀으로 완전히 바꾸는 거야. 이게 말씀으로 완전히 바껴서 새롭게 채워지지 않으면 똑같은 상황이 올 때마다 너는 계속 흔들릴 수 밖에 없어. 너가 먼저 변화되야 해. 이런 과정이 20살 넘어가면 최소 3년은 걸려. 그런데 직장다니고 가정있는 사람이 다 내팽개치고 그렇게 할 수 있겠니? 없지, 그러니까 그렇게 계속 살 수 밖에 없는거야. 조금이라도 젊을 때 휴학하면서 할 수 있는게 다행인거야. 너가 봉사하는 건 필요하니까 다 하되 남는 시간은 진짜 전부 다 말씀에 투자해야 해. 나는 40년 전에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되고 다른 어떤 것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 다 쓸데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래서 이 말씀이 진리다라고 믿고 그냥 목숨 건거야. 그 정도 각오가 있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안 바뀌어 사람은"

그렇게 눈물 흘리며 말씀을 나누고 목사님께서 함께 기도해주시고 다시 본당에 올라와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생각나는 말씀이 있었다.

(빌 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래. 나의 방향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방향전환이다. 내가 이 휴학기간만이라도 말씀 이외의 것에는 어떤 관심도 쏟지 않겠다. 이 진리에 목숨걸겠다는 각오로 말씀에 꽂아야겠다. 바울의 고백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쫓아 달려가겠다.

(5)적용과 실천 그래서 말씀부터 보고 듣기로 마음먹었다. 신앙여정 팀이 있지만 스케쥴이 맞이 않아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을 틈 날 때마다 들으면서 드는 질문이 있으면 그때마다 사역자분들께 찾아가 묻기로 하였다. 매일같이 듣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승호형과 함께 새생명을 한 과를 계속 반복해서 듣기로 했다. 박목사님께서 승호형에게 추천하신 방법이었지만 나에게도 너무 필요한 방법인 것 같다. 진짜 그 새생명이란 것이 내 안에 뚫릴 때까지 집중적으로 같은 말씀을 듣고 또 들어보겠다 다짐한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승호형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나 혼자서라면 너무나 힘들기만 하고 괴로울 것 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서로 의지하고 버티면서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청년이 되길 꿈꾼다.

(6)기도 주님, 내가 필요한 것은 방향전환입니다. 지금까지 나로부터 시작된 나의 데레크가 너무나도 많이 나있어서 이것이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으로 데레크를 다시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 이 말씀에 목숨거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전부 다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만 쫓아가길 원합니다. 이미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를 대신하여 바닥을 쳐주신 주님,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는 것인 줄 믿사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소서. 내 영혼에 이 새생명이 진짜 생명이 되기까지 믿음으로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말씀을 그대로 믿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눈으로 보기 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하시며 이렇게 지켜와주심에 감사합니다. 감사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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